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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그,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 1990)

영화

by JJJAY 2023. 3. 1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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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이 1990년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 영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탓에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쓸쓸한 관계에 대해 묘사했다. 개봉 당시에는 대중의 기대에 어긋난 주제와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지금은 왕가위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왕가위 작품세계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회귀점으로 평가받는다. 

홍콩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5개 부문을 수상했다.

 

장국영장만옥유가령장학우유덕화양조위 등 홍콩 영화의 젊은 스타들이 총출동한 영화이며, 그 스타들이 하나같이 정적이고 우울한 역할을 담당한 것도 포인트이다. 특히 주인공 격인 장국영은 배역과 혼연일체된 섬세한 연기와 포텐 터진 훌륭한 비주얼을 보여주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특히 런닝셔츠 바람으로 혼자서 방 안에서 맘보춤을 추던 장면과, 두 주먹을 쥐고 필리핀의 숲길을 걸어가던 뒷모습이 유명하다.

아비는 늘 여자를 갈구하지만 깊은 사랑은 경계하는 바람둥이다. 도박장의 매표소에서 일하는 소려진에게 먼저 접근해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해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이도 잠시, 아비는 소려진을 자신의 집에서 쫓아낸 뒤 댄서인 루루를 들여 또 다른 사랑을 나눈다. 루루는 소극적인 소려진과 달라서 아비가 자신에게 싫증을 느꼈다는 걸 눈치채고는 헤어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럼에도 루루에게 매몰차게 이별 선언을 하는 아비에게는 길게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어려서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지금의 양어머니에게 입양된 것이다. 게다가 양어머니 역시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까닭에 아비의 분노를 부른다. 루루와 헤어지고 양어머니에게서 기어이 친어머니의 정보를 받아낸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한다.

한편 버림받은 소려진은 아비에게서 자신의 짐을 받으러 갔다가 그곳을 지나치던 경관을 만난다. 초췌한 소려진을 위로하던 경관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 역시 짧게 끝나고 만다. 소려진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경관 일을 그만 둔 남자는 선원이 되어 필리핀에 가게 된다.

 

루루는 아비에게서 버림받은 뒤 한동안 방황한다. 그리고 전부터 그녀를 짝사랑해온 아비의 친구는 그녀를 쫓아다니지만 그녀는 아비만 찾는다. 결국 아비의 친구는 자기의 차까지 팔아 루루가 필리핀으로 갈 여비를 마련해준 뒤, 만약 아비랑 이어지지 못하거든 자기에게 와달라고 고백한다.

 

한편 아비는 필리핀에서 친어머니가 사는 저택을 찾아내어 방문하지만, 그녀가 집에 안 계신다는 가정부의 얘기를 듣고 그냥 돌아간다. 한편 선원이 된 남자는 우연히 길을 가던 중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비를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간다. 정신을 차린 아비는 남자에게 필리핀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런 뒤 어느 바로 데리고 갔다가 위장 여권을 거래하던 중 상대방을 칼로 찌르면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아비와 남자는 역에서 격투를 펼치며 탈출한 이후 필리핀의 열차에 탑승한다. 이 둘은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나, 남자가 다음 역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승무원에게 묻기 위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사이 아비는 칼에 찔린 여권 위조업자의 동료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암살 당한다. 아비는 돌아온 경관과 회한에 찬 듯한 마지막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 때 남자가 소려진이 이야기했던 영원히 기억될 1분에 대해 말을 꺼내게 되고, 아비는 그 1분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잊었노라고 이야기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왕가위의 첫 번째 작품은 열혈남아이나, 영화적 세계관이 최초로 구축된 건 아비정전부터였다. 열혈남아는 미장센이나 영상촬영 등의 방식에서는 왕가위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지만, 내러티브는 홍콩 느와르를 보다 사실적으로 다듬는 선에서 타협하여 흥행을 노린 작품이다. 반면 아비정전은 왕가위의 모든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인물상, 인간관계, 이미지, 주제의식, 주제의 표현방식 등이 처음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를 두고, 아비정전 이후 2046까지 왕가위의 모든 작품은 아비정전의 속편이라고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아비정전에서 일대종사까지를 포괄하는 왕가위 영화세계의 주제는 떠난 자 혹은 떠난 것에 대한 그리움과 그에 따른 허무함이다. 그리고 아비정전은 그 출발점이다. 아비정전에는 연애하는 이들도 있고 짝사랑하는 이도 등장하지만 온전히 맺어지는 커플은 없다. 아비(장국영)는 소려진(장만옥), 루루/미미(유가령)와 차례로 연애를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한다. 마음고생을 하는 소려진은 그녀를 동정하는 경관(유덕화)을 만나 호감을 표하지만 그 관계도 짧게 끝날 뿐이다. 소려진과 다르게 루루는 떠난 아비를 찾아 나서지만, 아비의 사망으로 둘이 어떻게든 이어질 가능성은 완전히 차단되며, 공교롭게도 아비의 친구(장학우)가 그녀를 짝사랑하며 뒤를 따른다.

 

이상을 굳이 정리하자면 5각 관계의 사연인데, 그 중 단 한 커플도 끝까지 맺어지지 않으니 허무한 이야기인 셈이다. 다만 이와 같은 허무함이 그리움의 정서로 치환되는 건 극중 시간적 배경인 1960년대를 회상하듯 사연 당사자들의 내레이션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재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이와 같은 설정은 '아비정전' 만들어지던 당시의 홍콩이라는 국가의 지정학이 깊이 반영된 결과다. 1997 홍콩 반환 앞둔 주민들의 심정이라는 것은 아비처럼 여자에게서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불안감, 낳아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가 다른 것에서 오는 정체성의 문제 또는 소려진처럼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갖는 향수어린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왕가위는 발이 없어 지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날아가야 하는 없는 사연을 극중 아비의 입을 통해 수시로 노출하는 당시 홍콩 주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은유함으로써 주제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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